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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파라노이아가 생각하는 일과 연애의 공통점

by 아비투스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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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다른 조직에 몸 담고 있지만 가까운 선배가 있다. 공통의 관심사와 고민거리를 가진 덕에 얼굴은 자주 못뵈어도 연락을 나누곤 한다. 서로 책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좋은 책들을 다독하시기 때문에 선배 추천이면 왠만하면 읽어보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라는 책이다. 일본인 컨설턴트 출신인 '야마구치 슈'가 저자인데, 컨설턴트 특유의 콧대 높은 느낌에 처음 한 두장은 거부감이 들다가도 일본인 특유의 디테일한 맛이 있어 재밌게 읽은데다 저자의 다른 책도 탐독하였다. 철학 관련 서적 중엔 가장 실용적인 철학책일 것이다. 

 

출처: 교보문고 / 실용적인 철학에 대한 책

 

  책의 주된 내용은 직장생활의 순간 순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다양한 철학들을 녹여 풀어내고 해결방안까지 이야기한다. 그 중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이야기한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데, 모든 사전적 정의와 사례를 뒤로하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파라노이아는 한 직장에 뿌리내리고 눌러앉은 '공채'이고, 스키조프레니아는 몇 번의 이직 경험이 있는 '경력직'이다.

  파라노이아는 편집적이라는 뜻인데, 보통 그들을 구성하는 정체성에 편집증을 가지고 있다. 정체성에 획득에만 매진하며 삶의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의 기회속에서, 새로운 기회가 '지금까지의 내 정체성에 맞는가'에 집중한다. 누군가 보기에 알기쉽고 어느정도 삶의 궤적을 읽을 수 있는  '전형적인 사람' 그게 파라노이아다.

OO학교를 나와 OO동네에 살며 OO기업을 다니는...

 반면, 스키조프레니아는 '재빠르게 도망치는 사람' 으로 묘사되는데, 가족도 가지지 않고 언제든 짐가방 한개로 미련없이 훌훌 털고 거처를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덴티티나 타자의 시선에 비추는 자신의 이미지는 신경쓰지 않고 우발적으로 찾아온 변화의 기회에 본능과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출처 : pixabay

 

  기본적인 파라노이아형 인간의 습성은 정주(定住) 한다는 것이다. 뿌리를 내려 가정을 이루고 성 안에서 엉덩이 무겁게 눌러앉아 다른 파라노이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투닥거리며 산다. 가부장적이고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가정과 조직의 발전을 위해 힘쓴다. 이런 것들이 미덕이라 여겨지던 덕분에 근현대의 발전은 이런 편집증적인 추진력에 의해 성장했다. 이렇게 챗바퀴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는한 그들은 여전히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챗바퀴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도래했을때 그들은 한없이 취약하다. 그때 등장하는게 바로 '재빨리 도망치는 사람'인 스키조프레니아다. 그들은 가지지도 않고 항상 경계에 머무르며 그때 그때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처자식에게 집중할 수도 없지만 기회가 있을때 자손을 뿌려 적당히 운에 맡긴다. 그들이 자라왔던 것처럼.. 그들의 유일한 자산과 무기는 변화하는 상황을 맡는 민감한 후각, 우연을 읽는 직감뿐이다.

 

 필자는 전형적인 파라노이아형으로 '흔들리지 않는' , '외길 수십년', '일관적인' 과 같은 것들을 예찬하는, 어찌보면 어수룩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이런말이 있다. 

운명과 기질은 같은 개념의 다른 말이다. 이름이다.

 필자는 어찌보면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 환경덕에 필연적으로 단단한 파라노이아가 되었는데 현재도 대기업 공채로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소위 회사의 이름을 딴 OO맨, OO맨으로 뿌리내리고 살아가고있다. 문제는 필자가 있는 울타리가 레거시 인더스트리로 울타리가 바람에 삐그덕 삐그덕 한다는 것이다. 이미 직관과 후각이 뛰어난 스키조프레니아들이 '나는 침몰하는 배랑 같이 물에 빠질 생각은 없수다. 먼저 갑니다.' 라며 이탈이 심화되고 있다. 

출처 : pixabay

 스키조프레니아를 동경하며 울타리 바깥의 세상을 틈만 나면 힐끗거리는 파라노이아로써 나름의 살 구멍을 틈만 나면 엿보고 있었다. 다행히 시장에서 원하는 나름의 기술과 레퍼를 어설프게나마 갖춘덕에 바로 옆에 구명선이 보인다. 타이타닉의 멋진 악단 처럼 바이올린을 켜면서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며 배와 함께 가라 앉을지, 지금이라도 체면없이 구명선에 올라탈지 둘 사이에 어쩔바 몰라 갈등하는 나를 보면서 문듯 첫 연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혹은 이직)과 연애(혹은 이별)는 매우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1. 이별엔 한방울의 미련도 없어야 한다.

  열렬히 사랑하고 치열하게 싸우다 지쳐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몰입을하고 쏟아 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채 '지금 사귀는 여자도 괜찮은데... 새로 연락오는 사람한번 만나볼까..' 하는 마음에 섣불리 환승 이별을 했다가는 새로운 애인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찬바람에 호빵 생각나듯 이전의 인연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다 술 왕창 취해 새벽 2시에 카톡 날리는거다. '자..?' 

 

2. 공짜는 없다.

얻는게 있다면 잃는게 있기 마련이다. 기존의 회사에서 쌓아 놨던 인적 네트워크, 평판, 공채 프리미엄(?)들은 한번 잃는 순간 끝이다. 한 때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들을 점유하고 있던 곳과 사람들은 완연한 남이되고 그자리를 새로운 사람들과 문화가 채우게 된다. 훌쩍 올려가는 연봉은 이런 상실에 대한 보상 비용이 아닐까. 

 

3. 완벽한 애인은 없고, 권태기는 오기마련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 에서의 남주인공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완벽한 썸머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 몸서리 치는 포인트로 변하게 된다. 아무리 멋져보였던 사람도 내 것이 되고 오랜 인연을 지속하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다 보면 권태기는 오기 마련이다. '그 놈이 그 놈이다' 라는 말도 괜히 생긴말이 아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인생이 바뀌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것 같은 많은 기대와 청사진은 필연적으로 실망을 야기한다. 

 

 

출처 : pixabay

 

늘상 스키조프레니아를 나약하고 경박하다 생각했지만, 그야말로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모두들 어떻게 그렇게 이직을 잘할까. 그리고 내게 스키조프레니아로 변환할 수 있다는 기회가 온다면 편집적으로 모아왔던 내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내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온전한 스키조프레니아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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