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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식판 인생

by 아비투스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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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nsplash.com Photo by Tim Gouw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회의적인 순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 그런 하루와 순간들. 그런 순간과 마주 할때, 칠순이 넘은 아버지와 세살박이 아들을 떠올린다.

"한국 경제인구중 근로자비율이 80%이상이고,
내 아들이 나와 비슷한 길을 밟아 온다면 필시 근로자의 삶을 살게 될텐데
이런 순간을 마주할 일이 있겠지??"

"우리 아버지도 직장 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순간을 마주하셨겠지,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런 이야기를 와이프에게 한 적이 있다.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보통 와이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데 이번에도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남들도 다 하고 그게 다 사회생활이지 뭐~"
맞는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을까. 내 점심은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에서 급식으로 바뀌었다. 식당이 따로 없어 당번 3명 정도가 낑낑대며 철밥차(?)를 끌고와서 각 교실로 가져와서 배식을 했다. 도시락을 까먹을때는 고기 반찬이 없는날은 왠지모르게 친구들 도시락과 비교하며 은근히 신경쓰였는데, 모두가 같은 '식판'을 들고 같은 반찬과 밥을 먹는것이 어린 마음에 일종의 '안도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식판'에 담긴 그 안도감은 중고등학교까지 쭈욱 이어졌다.

철밥차는 이런식으로 생겼었다.


교복과 급식의 세월을 지나 대학교에 입학하고, 갑작스레 엄청난 자유가 주워짐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있다. 12년간 가둬놓았다가 갑자기 그렇게 방생을 하니,,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도 어느정도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나는 밥을 사먹을 수 있다는 것, 먹고싶은 점심을 매번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충격이었던것 같다. 신입생 시절, 학교 정문부터 중문, 후분까지 다양한 메뉴도 익숙함을 거쳐 지루해질때즈음 모두가 다시 학식으로 복귀했다. 가깝고 싸고 고민없고 무엇보다 '익숙'하고.. 그렇게 '식판 인생'은 계속되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해도, 배식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아마 대한민국 예비역이라면 훈련소에서부터 들었던 말이 아닐까. 별안간 주어졌던 자유는 다시 강탈당하며 군대라는 '식판'라이프의 최정점에 접어들게 된다. 반듯이 쓴 전투모와 왼쪽 팔에 단단하게 잡은 '식판' 그리고 박자에 맞춰 한 크리크씩 좌로 이동하며 채워지는 식판.. 그 식판을 하루에 세번씩 보며 남은 식사 횟수를 세워보곤 했다. (1132번..? X발.....)

전역과 대학을 졸업하여, 취업을 할 때 즈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SS전자 점심 식단! CJ OO 사내 식당 메뉴! ' 등과 같은 영상들이 종종 떠돌곤 했다. 그 사진에는 바깥에서도 쉽게 먹기 힘든 값 비싸고 화려한 메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담기 위한 식판도 3찬 스댕 식판이 아닌 각기 각색의 다양한 식판이었다. 식판도 긴밀하게 진화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식판을 들고 좌로 한크리크씩 이동하며 배식을 받는 김대리, 이부장님을 보니 형언할 수 없던 감정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묘한 이질감이었던 것 같다.

한 게임 회사의 '평범'한 사내식당. 먹는데 1시간 걸릴듯.



아. 나의 식판인생도 어쩌면 .. 종지부 인가?
취업 한 첫 직장의 큰 자랑중 하나가 '세끼 공짜' 였다. 창업주이신 정주영 회장님께서 직원들 만큼은 배불리 먹이자고 하셨다나.. 첫 출근날, 회사 직원 식당을 보고는, 끝날줄 알았던 '식판인생'이 계속되고 나는 실망보다는 안도했던것 같다. 식판을 떼어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하고 아빠가 되었다. 젖병을 떼고 이유식을 먹기 시작한 아들을 보며, 어느날 와이프가 내게 말했다.
'애기 이유식을 식판에 줄까??'

조금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음.. 편하고 좋지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회사에서 어떤 순간 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생각난다. 아빠가 되니 내 삶과 아들의 삶, 그리고 내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식판 인생을 살아왔고 아마도 자세히 말씀은 안하셨어도 아버지, 당신의 삶도 아마 그러셨을거다. 내 아들도 어린이집에서부터 식판을 들고 한 크리크씩 이동하는 삶을 살게 될거다.

이게 나쁜건가? 이게 맞는건가? 에 대한 답은 사실 아직도, 앞으로도 알 수 없을거다. 아마도 나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 이상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겠지. 다만 식판을 들고 무리속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아들을 상상해보면, 왠지 모르게 슬퍼지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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